쌓인 눈 위에 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.
너와 이어졌던 계절의 기억처럼
눈은 서서히 녹아만 간다.
"눈은 좀 치웠어?"
나긋이 물어본다.
눈을 치우는 것은 네 담당이지만
너는 요즘 통 자기 할 일을 안 한다.
"..."
부엌 저편에 있는 듯한 너는 뭐라고 했다.
아마 잘 들리지는 않아도
깜빡 잊어서 못 치웠다고 대답했으리라.
"눈에 미끄러지면 다치니까.. 다 녹으면 같이 산책가자."
어렴풋이 기억나는 해질녘 분수공원의
추운 날씨에도 따듯했던 벤치의 감촉 때문일까?
산책을 좋아하는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였다.
"..."
봄비 내리는 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서일까
대답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.
그래도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.
너는 아마 그러자고 했겠지?
들뜬 마음에 뭘 입고갈지 고민하면서
옷장을 뒤지는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.
그 모습에 내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번진다.
따듯한 봄이 오고 있으니 봄옷을 꺼내야 하겠지?
"잠시만, 이제 봄옷 꺼내자"
옷장 제일 위쪽에 있는
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크기의
가벼운 종이 상자를 내리운다.
"콜록... 콜록!"
날아드는 먼지를 손으로 휘젓는다.
겨우내 옷장 제일 깊숙이 방치되어 있어서일까?
상자에는 먼지가 뿌옇게 묻어있다.
먼지를 좀 흩어내고, 환기를 해야 할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
일단은 상자를 열어 봄옷을 꺼내고 정리한다.
내 옷장이 어느정도 정리가 끝난 뒤에 나는 걱정한다.
"봄옷이 너무 없는 거 아냐? 네가 제일 좋아하는 얇은 병아리색 스웨터는 어딨어?"
의아하다. 이렇게 옷이 없었다고?
그래도 너는 네가 좋아하는 옷 한 벌 쯤은 아마도 꼭 챙겨뒀을 것이다.
나는 얼마 남지도 않은 상자 속 봄옷을 뒤져보며 말한다.
"한번 찾아 봐. 이상하게 없어.. 어디에 넣어뒀는지 기억 안 나?"
상자 속을 꼼꼼하게 뒤져본다.
스웨터는 내가 찾기 힘들겠네..
그래도 오랜만에 재밌는 것을 찾아냈다.
"와.. 앨범이 있네"
너라면 내 옆에서 같이 봤을까?
얇은 앨범이 한장 한장 넘겨진다.
얼마 안 가 앨범은 마지막 장까지 다다랐다.
"이 때 기억나? 솔직히.. 난 이 사진 찍기 전까지만 해도 산책이랑 공원은 별로 안 좋아했어."
분수공원에서 나와 너는 늦게까지 앉아 첫 데이트를 즐겼다.
눈이 녹아 없어지듯이 사라지려고만 하던 그때의 네 함박웃음
그 기억이 다시 눈으로 내리듯, 한참이 지나서야 떠올랐다.
눈이 녹고, 한 해 만에 다시 내리듯
나는 너를 한 해마다 잊어가고,
또 한 해마다 기억해내곤 했다.
두꺼운 기억 속, 가장 마지막 장의 너는
네가 가장 좋아하던, 내가 선물한 스웨터를 품에 넣고서는
눈물도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
내 생에 가장 듣고싶지 않았던, 단 두 마디만을 남겼다.
"지금까지 고마웠어요. 덕분에 항상 행복했어요."
이제는 떨리기만 하는 내 손에, 간신히 쥐여있는
손때묻고 얼룩진 옛날 사진에도
새해의 봄비가 내리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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